Sereno - 사랑하여 모든 것들에게
writer. floyd_kanojo
친애하는 라파엘 트와이닝 영애.
그간 안녕하셨나요, 영애. 격조했습니다.
……무어라 말씀을 드리면 좋을까요. 그래요, 서신의 시작부터 저답지 않은 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능한 당신에게는 정제된 말로,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말을 건네고 드리고 싶은데 말이죠.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게 다만 후회될 따름이군요.
……하아, 변명하지는 않는 게 좋겠죠. 그래봤자 당신은 나의 민낯을 너무 잘 아니까. 제가 스스로를 아무리 꾸며낸다고 해도, 당신은 내게 관심도 없을 터이니까요.
그동안 제대로 서신을 드리지 못했죠. 부치지 않은, 아니, 부치지 못 한 편지가 서랍을 다 채우고, 당신의 철자 하나하나를 양피지 위에 내리는 순간에, 후회랄 것들이 속속히 생기곤 하더군요. 저는 과거는 덮어두고 지내자는 주의입니다. 굳이 뒤를 돌아볼 필요는 없어요. 그것이 저의 지론. 틀렸다고 판단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늘 제가 믿기로 옳은 길을 택했어요. 그때의 제가 했던 선택은, 그때에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당신의 앞에 설 때마다 자신에 대한 의식에 흔들림이 생기게 되는군요. 왜일까요,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아도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을 사모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지만요. 이것이 독인지 약인지는, 먼 훗날에 가서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트와이닝 영애, 저는 알다시피 주변으로부터 무척이나 이성적인 사람, 이라는 평가를 듣고는 하죠.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주 감정적이고 간교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전 어린 시절의 과거를 되짚어보자면, 오직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로,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다는 오만으로…… 아아, 실례. 그것은 오만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때의 저는 어렸고, 감정적이었어요. 다른 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분노만으로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이제 그때의 저는 사라졌다고 믿고 있었는데, 당신을 보며 또 싹틔우기 시작한 감정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아직도 지독하게 어린 모양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신에게 전 단 한 순간도 솔직했던 적이 없었죠. 보고 싶다는 말을 에둘러 말하는 방법은 수만 가지가 있지만, 그저 보고 싶다고 말씀드리면 될 것을. 보고 싶어요. 트와이닝 영애. 당신이 저를 기다렸는지, 저를 한순간도 기억하지도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신을 지난겨울에 만난 이후로, 새로운 꽃이 폈고, 그 꽃들이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섰습니다. 압니까? 당신은 바깥을 잘 나돌지 않으니까. 트와이닝 가문에는 어떤 꽃이 피는지, 어떤 식물들이 자라나는지, 거기에도 제가 좋아하는 바닷가의 파도 소리가 들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당신을 잘 모르니까요. 제가 이 이상으로 격식을 차릴 수 없어, 다만 유감입니다.
일전부터 플로이드, ……아아, 이리 말하면 역시 알 수 없을까요. 리치 가의 차남을 통해서 연락을 전해 달라고는 말하긴 했으나, 그가 제대로 제 뜻을 잘 전했을지는 모를 일이군요. 제이드……. 는 아시겠죠. 그에게 부탁하기에는, 영 미덥지 않은 부분이 있는지라. 흠흠. 어쨌든, 그는 어느 가문에 자주 드나들거나, 들쑤시고 다녀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으니까요. 그게 제아무리 그 저명한 백작가의 ‘트와이닝’ 가문이라도 말입니다……. 아. 제멋대로 산다는 것은, 아마도 모든 것을 계획 하에 진행하는 저로서는 하지 못 할 일이지만, 어느 때에는 그런 방식으로, 제멋대로 구는 그의 면모가 부러워질 때도 있군요.
제가 사람을 대면하는 것은, 사업가 된 도리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보통은 가주를 앞에 두고 상대하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무엇보다 트와이닝 가문과, 저희 아셴그로토 가문 사이의 왕래는 적은 편이고요.
그러니 아무래도 사적인 시간을 내어서, 트와이닝 가문을 찾아가서 당신의 이름을 사사로이 호명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눈에 좋아 보이지는 않겠죠. 제가 당신을 친애하는 감정을 전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어쩌면 다음 날 발간되는 가십거리를 담은 일간지에 당신과 저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오히려 눈엣가시로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솔직히, 저의 명성에는 그다지 관심 없습니다. 그래봐야 간교한 장사치, 지금도 어디에서는 그 정도의 호칭으로 불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름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니까요. 그것은 제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나저나, 플로이드가 멋대로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을 다 잘라내고, 간단히 요약해서 전하지는 않았을지. 하아아……. 제가 전해달라고 한 말은 잘 지냈느냐는 인사보다도, 당신에게 건넬 말을 먼저 생각했어요. 펜과 종이를 찾아, 당신에게 쓸 이야기를 몇 번이나 고민했습니다. 어떤 말을 건네야 당신에게 최선의 말을 드릴 수 있는지,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한다는 말? 글쎄요.
아무튼, 최근 들어 부쩍, 사교계에서 당신을 볼 일이 적었던 것 같은데, 제 착각이었을까요. 아니, 착각이 아니겠죠. 저는 어딜가나 당신만 찾으니까. 어느 군중들 사이에서도 당신을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으니까요. 제가 최근에 무도회나, 사교 모임 것 같은 곳으로 최근에 자주 발걸음한 건 그다지 당신 때문은 아니지만……. 아니, 역시 정정해야겠습니다. 이런 필서에서마저 솔직하지 못 한 것은 비겁한 짓이겠죠. 역시 당신 때문이 가장 큽니다. 트와이닝 영애.
저의, 아셴그로트 가문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당신에게 한 적 없었죠. 다시 생각해보면, 당신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아니, 애초에 제 이야기를 궁금하다 여긴 적이 있던가요, 그것만은 조금 궁금하지만요. 어느 서적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 사람이 궁금해지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는 것을 느끼는 것도, 더 이상 그에 대해서 궁금해지지 않는 것이라는……. 어쩌면 저의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요. 당신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유를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제가 당신의 정보를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것에 대해서 사죄를 구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부재한 동안,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 여러 소식을 들었습니다. 장사치에게 정보는 언제나 재산으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그 대부분은 그 사람에 대한 약점이 되거나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정보를, 저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한 적은 그다지 없습니다. 당신의 일에 한해서는 저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결국, 사용하게 되는 군요. 용서하세요.
당신의 소식을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으나, 사용인에게 심부름을 시켜, 트와이닝 가문의 주변으로 도는, 영애께서 며칠을 내리 앓고 있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차마 참을 수가 없었어. 조바심이 나서, 그러니까,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 참을 수가 없어서…….
……사족이 길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보고 싶습니다. 아픈 당신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아요. 에둘러 말하지 않을게요. 당신이 부재한 이유에 대해 많은 소문이 돌았는데, 아무도 당신의 안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단지 소문인지, 아니면 그것이 사실일지 알 길이 없었어요. 아무리 수소문해도 트와이닝 가의 영애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이는 없더군요.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다만 괜찮다는 소식 하나만 저에게 흘려보내줄 수 없습니까? 다만 한 문장이라도 좋아요.
부재한 시간 내내, 침대에 누워서 계절을 내리 앓고 있을 당신만 생각했어요.
그러다 봄이 오더군요. 어느덧 그렇게 되었어요. 봄철에 피는, 금사를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꽃을 발견했습니다. 하인에게 물어보니, 팬지꽃이라 말해주더군요. 꽃말은…….
햇빛에 말린 꽃잎을 하나. 그리고 식물 사전을 함께 동봉해서 보냅니다. 그리고 저의 마음을, 영애의 눈동자를 닮은 꽃을 기억해주세요.
다음에는 꼭 당신을 보고 싶어요. 그리고 괜찮다는 말을, 당신의 목소리로 듣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친애하는, 당신의 아즐 아셴그로토.
팬지 (Pansy)
개화기 : 4월~5월
꽃말 : 순애, 나를 생각해 주세요, 사색
어느 날, 하늘을 날아다니던 천사들이 지상에 피어있는 하얀 제비꽃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라 땅 위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제비꽃에게 축복을 속삭이며 세 번의 키스를 한 후 다시 하늘 높이 날아갔습니다.
그렇게 제비꽃은 세 가지 색상의, 사람 모양의 무늬를 가진 팬지가 되었답니다.
후기
전설에는 하얀 제비꽃이라고 명시되어있지만 보통 제비꽃하면 보라색을 떠올리게 되잖아요? 근데 찾아보니 보라색 제비꽃은 '성실, 사랑' 그리고 흰색 제비꽃은 '순진무구한 사랑' 이라고......'이성적이고 간교한' 그가 라파엘에게만큼은 순수한 사랑을 성실히...헌신적으로 바치는 게 너무나도 좋았어요.
라파엘과 함께 하기 위해 그가 인간의 두 다리로 살아가기로 결심 한 것 같고, 라파엘로 인해 그의 세상이 더 다채로워 진 것 같아서 좋아하는 편지입니다...